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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칼럼] 투수의 지배력인가 타자의 꾸준함인가, WAR이 감춘 포지션의 계급도

by siestaplan 2025. 11. 18.

[에디터의 한마디] 야구 역사상 가장 풀기 어려운 난제 중 하나는 "리그를 지배하는 에이스 투수와 매일 담장을 넘기는 홈런왕 중 누가 더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해답을 찾기 위해 현대 야구는 WAR(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이라는 통합 지표를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WAR이라는 숫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출전 횟수에 따른 누적의 원리와 포지션별 난이도에 따른 '보정'이라는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투수와 타자의 가치 대결, 그리고 1루수나 지명타자가 WAR이라는 저울 위에서 겪는 숙명적인 불리함에 대해 깊이 있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1. 누적의 마법과 단판의 지배력: 투수와 타자의 WAR 동상이몽

WAR은 투수와 타자를 '팀 승리 기여'라는 동일한 단위로 묶어냈지만, 두 포지션의 출전 구조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타자는 부상이 없는 한 시즌 162경기(KBO 144경기)에 매일 출전하여 기회를 쌓을 수 있습니다. 반면 선발 투수는 로테이션에 따라 시즌당 30경기 내외의 출전 기회만을 가집니다. WAR이 '누적 지표'라는 점을 고려하면, 산술적으로 타자가 투수보다 높은 WAR을 기록하기에 훨씬 유리한 구조입니다.

그러나 숫자가 놓치는 지점은 '단일 경기 영향력'입니다. 5.0의 WAR을 기록한 타자는 한 시즌 동안 조금씩 승리 확률을 높여왔지만, 똑같이 5.0을 기록한 투수는 자신이 등판한 30경기에서 경기를 완전히 지배하며 승패를 직접 결정지었습니다. 특히 단기전이나 포스트시즌에서 에이스 투수 한 명이 시리즈 전체를 집어삼키는 현상은, 누적 지표인 WAR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투수만의 독보적인 가치를 대변합니다. 따라서 투수와 타자를 비교할 때는 총 수치뿐만 아니라, 그들이 소화한 이닝과 경기 수 대비 기여도라는 맥락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합니다.

2. 포지션 보정의 딜레마: 1루수와 지명타자는 왜 늘 손해를 보는가?

타자들 사이에서도 WAR은 포지션에 따라 '계급'을 나눕니다. 이를 '포지션 보정(Positional Adjustment)'이라 부릅니다. 유격수, 포수, 중견수처럼 수비 부담이 크고 대체 선수를 구하기 어려운 포지션은 WAR 계산 시 상당한 가산점을 받습니다. 반면 수비 부담이 적은 1루수나 수비를 아예 하지 않는 지명타자(DH)는 시작부터 큰 감점을 안고 들어갑니다.

이로 인해 1루수와 지명타자는 'WAR의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만약 유격수와 지명타자가 똑같이 30홈런에 100타점을 기록했다면, WAR 수치는 유격수 쪽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납니다. 지명타자가 유격수만큼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수비에서 얻는 이점을 상쇄할 만큼 훨씬 더 파괴적인 공격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 때문에 거포형 1루수나 전업 지명타자들은 실제 팀 타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WAR 순위에서는 수비력이 좋은 센터라인 야수들에게 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WAR이 '종합적인 가치'를 측정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순수한 '타격 생산력'을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3. 지표의 균형 잡기: 숫자 뒤에 숨은 진짜 야구 실력을 보는 법

결국 현명한 야구팬이라면 WAR 수치 하나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그 숫자가 만들어진 과정을 입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수비 기여도가 낮은 포지션의 선수를 평가할 때는 WAR과 더불어 wRC+(조정 득점 생산력)나 OPS+와 같은 공격 특화 지표를 반드시 병행해서 살펴야 합니다. 또한, 투수의 가치를 논할 때는 그가 등판했을 때 팀이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과 불펜 소모 억제력 등 수치화하기 힘든 무형의 가치도 고려해야 합니다.

현대 야구에서 '최고의 선수'란 단순히 WAR이 가장 높은 선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맡은 포지션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그 역할에서 기대되는 가치를 압도적으로 상회하는 선수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지닙니다. 유격수가 수비 실책 없이 20홈런을 치는 것만큼이나, 지명타자가 수비 감점을 모두 씻어낼 만큼의 압도적인 장타력으로 상대 투수를 공포에 몰아넣는 것 역시 팀 승리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 숫자는 도구일 뿐, 가치는 필드 위에서 완성된다

WAR은 야구라는 복잡한 스포츠를 이해하는 가장 훌륭한 나침반이지만, 결코 결승선 그 자체는 아닙니다. 투수와 타자의 가치 차이, 포지션 보정의 유불리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선수들의 기록을 더 공정하고 깊이 있게 바라보기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응원하는 팀의 1루수가 수비력이 낮다는 이유로 WAR 평가에서 저평가받고 있다면, 그가 타석에서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팀의 다른 타자들에게 주는 시너지 효과를 떠올려 보세요. 또한 에이스 투수가 일주일에 단 한 번 등판함에도 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지 그 압도적인 지배력을 반추해 보시기 바랍니다. 숫자가 담아내지 못한 야구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라운드 위에서 흐르는 땀방울과 찰나의 승부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