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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칼럼] 로봇 주심의 시대, ABS가 설계하는 야구의 새로운 정의와 딜레마

by siestaplan 2025. 11. 14.

[에디터의 한마디] "스트라이크!" 주심의 이 한마디는 야구 경기에서 가장 절대적인 권위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눈은 완벽하지 않았고, 찰나의 순간에 결정되는 볼-스트라이크 판정은 늘 오심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경기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순간, 심판의 주관적인 존(Zone)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했던 선수와 팬들의 원성은 결국 기술의 도입을 불러왔습니다. 바로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 이른바 'ABS(Automated Ball-Strike System)'의 등장입니다. 오늘은 야구의 공정성을 혁명적으로 높인 이 '로봇 주심'의 기술적 실체와, 그로 인해 우리가 잃게 된 야구의 낭만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어린 포수가 흰색 헬멧과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포수 장비를 착용한 채 공을 잡기 위해 웅크리고 있으며, 그 옆에 심판이 서서 판정을 준비하고 있다. 배트가 공중에 떠 있는 것이 보인다.

 

1. 밀리미터 단위의 정의: ABS의 기술적 메커니즘과 작동 원리

 

ABS는 단순히 카메라로 공을 보는 수준을 넘어, 첨단 트래킹 기술이 집약된 시스템입니다. 경기장 곳곳에 설치된 고성능 레이더 센서와 초고속 카메라는 투수가 던진 공의 궤적을 3차원으로 실시간 추적합니다. 핵심은 '개인별 맞춤형 스트라이크 존'의 설정입니다. ABS는 타자의 신장을 센서로 측정하여, 각 타자의 무릎 상단과 가슴 하단 사이의 공간을 정확히 계산합니다. 이를 통해 신장 160cm의 타자와 190cm의 타자에게 서로 다른, 그러나 각자의 신체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공정한 존을 적용합니다.

 

시스템이 판단한 결과는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주심의 헤드셋으로 전달됩니다. 주심은 기계의 판정을 그대로 외치기만 하면 되는 'Full ABS' 방식이 도입되면서, 이제 스트라이크 존은 심판의 기분이나 관중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물리적 성역이 되었습니다. 이는 판정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야구 역사상 유례없는 진보를 이루어냈으며, 투수와 타자 모두에게 명확한 기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기술적 완성도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2. 공정성의 승리: ABS가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와 전략적 진화

ABS 도입의 가장 큰 수혜는 역시 '공정성'입니다. 인간 심판은 경기 후반으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특정 투수의 명성에 따라 존이 관대해지는 '베테랑 우대'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ABS에는 감정이 없습니다. 1회 초 첫 번째 공과 9회 말 끝내기 상황의 공을 똑같은 기준표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러한 판정의 균일화는 선수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타자는 존을 벗어난 공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되었고, 투수는 정교한 제구력만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공을 믿고 던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모호한 존을 공략하는 '심판 맞춤형 투구' 대신, 데이터로 정의된 ABS 존의 경계선을 정확히 통과시키는 '수학적 투구'가 중요해졌습니다. 이는 투수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제구력을 요구하게 되었고, 경기 시간 단축(Pace of Play)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판정에 대한 항의로 경기가 중단되는 일이 사라지면서 팬들은 더욱 박진감 넘치는 경기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사라진 낭만과 포지션의 위기: 기술이 앗아간 야구의 예술성

하지만 모든 기술적 진보에는 그림자가 따릅니다. ABS 도입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포수 포지션입니다. 과거 뛰어난 포수의 상징이었던 '프레이밍(Framing)' 기술, 즉 볼을 스트라이크처럼 보이게 잡아채는 숙련된 손기술은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기계는 공이 포수 미트에 꽂히기 전, 이미 스트라이크 존 통과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포수의 가치는 프레이밍이라는 예술적 영역에서 블로킹과 송구라는 순수 물리적 수비 능력으로 축소되었습니다.

 

또한, 야구장의 '인간적인 드라마'가 사라졌다는 비판도 거셉니다. 주심과 포수, 투수가 벌이던 미묘한 기 싸움과 심리적 교감, 그리고 때로는 논란마저도 경기의 일부로 즐기던 야구 특유의 문화적 요소가 기계적인 정교함 아래 매몰되었습니다. 심판의 권위는 '전달자' 수준으로 격하되었고, 야구는 점차 비디오 게임처럼 정해진 규칙대로만 흘러가는 차가운 스포츠로 변모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기술이 오심을 지웠지만, 그 자리에 있던 야구의 숨결까지 지운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되는 대목입니다.

 

🏁 기술과 전통의 공존을 향한 전환점

ABS는 야구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지향점인 '공정성'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스템이 주는 정확성만큼이나, 야구가 왜 인간의 스포츠인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ABS는 판정 시비를 없애는 훌륭한 도구이지만, 결국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고 타석에서 배트를 휘두르는 것은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인간입니다.

 

이제 팬들은 중계 화면에 나타나는 가상의 사각형을 보며 판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넘어, 그 엄격한 기준 속에서 선수들이 어떻게 한계를 극복하는지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ABS는 야구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입니다. 기술의 완벽함과 인간의 불완전함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야구는 더욱 깊고 정교한 재미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데이터 중심의 야구와 전통적인 현장 감각의 대결, '역대 최고의 감독 논쟁: 데이터파 vs 더그아웃파'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을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