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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칼럼] 파울볼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 '위험 인수 원칙'과 안전 배려 의무의 법적 경계

by siestaplan 2026. 1. 8.

[에디터의 한마디] "날아오는 파울볼에 다쳤을 때, 구단에 치료비를 청구할 수 있을까?" 즐거워야 할 야구장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법이라는 차가운 잣대를 마주하게 됩니다. 단순히 운이 없었던 사고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관리 소홀인지에 대한 논쟁은 법조계에서도 오랫동안 다뤄온 뜨거운 감자입니다. 오늘은 스포츠 관람권 이면에 숨겨진 법적 권리와 의무, 그리고 '위험 인수 원칙'이라는 독특한 법리에 대해 심층 분석합니다.


투구 후 하늘을 올려다보는 야구 포수와 그 옆에 서 있는 심판의 모습. 포수는 붉은색 보호 장구(체스트 프로텍터, 레그 가드)를 착용하고 있으며, 파울볼을 따라가는 모습


 

1. 관중의 묵시적 합의: '위험 인수 원칙(Assumption of Risk)'이란 무엇인가?

야구장 입장권을 구매하고 관중석에 앉는 행위는 법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영미법과 한국 판례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위험 인수 원칙'입니다.

이는 관람객이 야구라는 경기의 본질상 파울볼이나 부러진 배트가 관중석으로 날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인지하고 있으며, 그 위험을 어느 정도 스스로 감수하겠다고 '묵시적으로 합의'했다는 논리입니다. 즉, 야구 경기에서 발생하는 통상적인 위험에 대해서는 구단이나 선수가 고의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발생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묻기 어렵다는 것이 과거 법조계의 지배적인 시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판결 흐름은 '관객의 무조건적인 감수'보다는 '구단의 적극적인 보호'로 그 무게추가 옮겨가고 있습니다.

2. 구단의 '안전 배려 의무'와 법적 책임의 범위

법원은 구단과 경기장 운영자에게 '안전 배려 의무'를 부여합니다. 관중이 경기를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시설물을 정비하고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어디까지가 적정한 보호인가?'입니다.

  • 그물망 설치의 적정성: 가장 빈번한 쟁점은 백스탑(본루 후면) 그물망의 높이와 범위입니다. 타구 속도가 가장 빠른 내야 구역에 적절한 보호망을 설치했는지, 혹은 그물망에 구멍이 난 상태로 방치되지는 않았는지가 책임 소재를 가르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 경고 및 고지의 의무: 전광판 자막, 아나운서의 안내 방송, 입장권 뒷면의 주의사항 기재 등이 포함됩니다. 구단이 위험성을 충분히 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중이 경기에 집중하지 않거나 안전 요원의 지시를 무시했다면, 관중의 '과실 비율'이 크게 산정됩니다.
  • 장소적 특수성: 외야석은 내야석보다 타구 도달 시간이 길기 때문에 관중이 피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그물망이 없는 구역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 법원은 구단의 책임을 더 무겁게 묻는 추세입니다.

3. 국내외 판례로 본 '파울볼 경제학': 100% 책임은 없다?

실제 판례를 분석해 보면 '과실 상계(Comparative Negligence)' 원칙이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사례 A (국내 판례): 파울볼에 맞아 안면 마비 부상을 입은 관중이 구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경우, 법원은 구단의 책임을 60% 내외로 인정한 바 있습니다. 구단이 보호망을 설치했지만, 관중 역시 야구 경기 중에 공이 날아올 수 있음을 인지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 사례 B (미국 판례): 메이저리그(MLB)는 과거 '야구장 원칙(The Baseball Rule)'을 고수하며 구단의 책임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17년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어린아이가 시속 160km가 넘는 파울볼에 맞아 중상을 입은 사건 이후, MLB 전 구단은 내야 전체에 그물망을 연장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법적 판결 이전에 '사회적 책임'이 우선시 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4. 보험 기술의 진화: 스포츠 사고 보상 시스템

최근에는 이러한 법적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관람객 배상책임보험'이 고도화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프로야구 구단은 입장권 가격에 보험료를 포함하여 사고 발생 시 법적 책임 유무와 별개로 치료비를 지원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는 구단 입장에서는 소송 리스크를 줄이고 브랜드 이미지를 보호하는 전략이며, 관중 입장에서는 복잡한 법적 다툼 없이 실질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합니다. 금융 공학이 법률적 한계를 보완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야구장 사고의 법적 책임 판단 기준 (체크리스트)

판단 요소 구단 책임 증가 요인 관중(피해자) 과실 증가 요인
시설물 상태 그물망 파손, 안전요원 미배치 안전 시설 내 임의 이탈
주의 고지 경고 방송 누락, 안내판 미설치 스마트폰 사용 등으로 경기 방관
사고 위치 타구 속도가 매우 빠른 내야석 피할 여유가 충분한 외야석
가해 객체 부러진 배트 등 예측 불가한 투척물 정상적인 경기 진행 중 발생한 파울볼

5. 법과 스포츠가 만나는 지점, '존중'과 '주의'

야구장에서의 법적 권리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관중은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고, 구단은 최선을 다해 위험을 방지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스포츠의 본질에는 '예측 불가능성'이 존재하며, 법은 이 영역을 '공동의 주의'로 해결하려 합니다.

우리가 야구장으로 향할 때 챙겨야 할 것은 글러브와 응원봉만이 아닙니다. 타자의 배트 끝에서 시작되는 서사적인 드라마를 즐기되,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물리적 위험에 대한 '시민적 각성'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법은 사고 이후의 수습을 담당하지만, 사고 이전의 안전은 구단의 꼼꼼한 관리와 관중의 집중력 있는 관람이 만날 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이 앉은 그 좌석, 그물망 너머의 법적 경계를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안전이 담보될 때, 야구의 낭만은 비로소 완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