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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칼럼] ABS(로봇 심판) 시대: 공정성과 기술 윤리의 경계

by siestaplan 2025. 12. 29.

[에디터의 한마디] 2024년, KBO 리그는 세계 프로야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바로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ABS, Automated Ball-Strike System), 이른바 '로봇 심판'의 전격 도입입니다. 수십 년간 '심판의 주관'이라는 성역에 머물러 있던 스트라이크 판정이 이제는 '기계적 알고리즘'의 영역으로 넘어왔습니다. 기술이 인간의 판단을 대체할 때 발생하는 공정성의 재정의 와 그 이면에 숨겨진 기술 윤리적 쟁점을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1. 데이터적 정의: 심판의 '직관'에서 '기계적 무결성'으로

과거 야구에서 스트라이크 존은 고무줄과 같았습니다. 심판의 성향, 타자의 이름값, 심지어 포수의 '프레이밍(미트질)' 기술에 따라 판정이 달라지는 것이 야구의 묘미이자 불신의 근원이었습니다. 팬들은 이를 '인간적인 실수'로 치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터져 나오는 오심에는 분노했습니다. ABS는 이 문제를 물리적 좌표와 센서 기반의 '절대적 기준'으로 해결했습니다.

ABS는 경기장에 설치된 고성능 추적 카메라가 공의 궤적을 3차원으로 실시간 렌더링합니다. 타자의 신장에 맞춰 설정된 상하한선과 홈플레이트의 좌우 끝단을 공이 단 1mm라도 스치면 기계는 가차 없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합니다. 이는 스포츠가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인 '동일한 조건에서의 경쟁'을 완벽하게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제 투수와 타자는 심판의 눈치를 살필 필요 없이, 오직 정교한 데이터와 자신의 물리적 기량에만 집중할 수 있는 진정한 실력 위주의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2. 알고리즘의 투명성과 '기술적 권력'의 문제

하지만 기술의 도입이 모든 갈등을 잠재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윤리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ABS의 판정 기준이 되는 '알고리즘'을 누가, 어떤 근거로 설계하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트라이크 존의 앞면을 통과해야 하는지, 뒷면을 통과해야 하는지에 대한 미세한 설정값의 변화는 특정 유형의 투수나 타자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알고리즘의 정치학'입니다. 만약 시스템에 보이지 않는 버그가 발생하거나, 데이터 전송 과정에서 미세한 지연(Latency)이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또한 인간 심판이 로봇의 판정을 이어폰으로 듣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통의 오류는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이러한 쟁점들은 현대 야구가 기술적 무결성을 넘어 '운용의 투명성'을 확보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기술은 도구일 뿐, 그 도구가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3. '인간미'와 '정확성' 사이의 철학적 선택

ABS 도입 이후 '포수의 프레이밍'이라는 고전적인 기술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야구의 기술적 퇴보라고 비판하며, 인간적인 서사가 사라진 야구는 체스 게임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스포츠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잘못된 판정으로 인한 불공정한 패배'입니다.

현대 스포츠 윤리학은 점차 '결과의 정확성'이 '과정의 인간미'보다 우선시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기술이 인간의 오차를 보정할 수 있다면, 그것을 거부할 명분은 약합니다. ABS는 단순한 장비 도입을 넘어, 야구라는 게임이 지향하는 가치의 중심을 '권위와 직관'에서 '데이터와 증거'로 이동시킨 거대한 철학적 전환점입니다. 앞으로 ABS가 세계 표준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기술적 고도화와 더불어, 판정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팬들에게 공개하여 '디지털 신뢰'를 구축하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 ABS 도입 전후의 패러다임 변화

구분 인간 심판 시대 (Umpire Era) ABS 도입 시대 (Robot Era) 변화의 핵심 가치
판정 기준 주관적 경험 및 직관 데이터 기반 절대 좌표 일관성 및 재현 가능성
포수의 역할 프레이밍을 통한 판정 유도 블로킹 및 도루 저지 집중 기술의 순수성 회복
경기 흐름 심판과의 항의 및 마찰 발생 판정 불신 감소, 경기 속도 향상 불필요한 논란의 종식
신뢰의 근거 심판의 권위와 경력 알고리즘의 투명성과 검증 기술적 무결성 확보

🏁 기술과 인간이 공존하는 새로운 야구 정의

ABS는 야구 판정의 정의를 인간의 시력이라는 한계에서 '기계적 정밀함'으로 확장했습니다. 비록 초기에 겪는 시스템적 시행착오나 정서적 거부감은 존재할지라도, 공정성을 향한 이 거대한 실험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ABS 시대의 성공은 기계가 얼마나 완벽하냐가 아니라, 인간이 그 기계를 얼마나 공정하게 관리하고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로봇이 공과 스트라이크를 판정할 때, 인간 심판은 기계가 보지 못하는 규칙의 미묘한 적용과 경기의 질서를 관리하는 더 높은 차원의 관리자로 진화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술 혁명 시대에 야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공정의 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