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수년간 대규모 에너지 및 인프라 분야에서 프로젝트 개발을 담당하며,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얽힌 사업들을 조율해 왔습니다. 특히 서로 다른 기업 문화와 자본을 가진 기업들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뭉치는 Joint Venture(JV, 합작법인) 구조를 관리하다 보면, 파트너사 간의 첨예한 이익 대립과 보이지 않는 주도권 싸움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주체들이 모인 현장에서 중심을 잡고 프로젝트를 파멸(Drop)의 리스크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리더가 가장 고심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체계적인 거버넌스(Governance)'의 구축입니다.
황동혁 감독의 글로벌 메가 히트작 <오징어 게임(Squid Game)>은 단순한 서바이벌 데스 게임을 넘어, 인간 사회의 규칙과 통제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발생하는 리스크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서사입니다. 상금 456억 원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짓밟아야 하는 가혹한 게임장은,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경고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오늘은 이 영화를 통해 계약서라는 딱딱한 규칙의 한계와, 대형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르는 '신뢰 자본'의 공학적 가치에 대해 논해보고자 합니다.

1. 홉스의 자연상태(State of Nature): 거버넌스가 부재한 조직의 파멸 리스크
토마스 홉스는 그의 명저 《리바이어던》에서 법과 공권력, 즉 통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원시적인 사회를 '자연상태(State of Nature)'라고 규정했습니다. 홉스는 이 상태를 "고독하고, 빈곤하고, 험악하고, 잔인하며, 짧은 인생"으로 묘사하며, 공포와 이기심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서로를 약탈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지옥이 될 뿐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영화 속 참가자들이 잠드는 '거대한 숙소'가 바로 이 자연상태의 축소판입니다. 밤이 되고 감시자들의 통제(규칙)가 사라지자, 숙소는 강자가 약자를 사냥하고 생존을 위해 배신이 판치는 지옥도로 변합니다. 시스템의 보호와 통제가 멈춘 순간, 공동체는 순식간에 붕괴하고 맙니다.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나 JV 조직에서도 이와 유사한 리스크가 잠재해 있습니다. 명확한 역할 분담(R&R)과 의사결정 체계(Governance)가 확립되지 않은 모호한 상태에서 돌발적인 악재(인허가 지연, 원자재가 폭등 등)가 터지면, 파트너사들은 프로젝트의 성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잊은 채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자연상태'로 돌변합니다. 서로의 정보와 데이터를 감추고 자기 회사의 손실을 방어하는 데만 급급한 조직은 결국 연쇄적인 공정 마비를 겪으며 좌초하게 됩니다. 리스크 매니저는 조직 내에 이러한 '거버넌스의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상시 감시해야 합니다.
2. 리바이어던(Leviathan)의 탄생: 계약서(Contract)라는 규칙이 가진 한계
홉스는 이러한 자연상태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한 군데로 양도하고 모두가 복종할 강력한 절대 권력체인 '리바이어던(Leviathan)'을 탄생시켰다고 말했습니다. 구성원들이 서로 피해를 주지 않기로 약속하고 이를 어기면 처벌하는 법적 주체를 세운 것, 이것이 바로 '사회계약(Social Contract)'의 본질입니다.
<오징어 게임>에서도 이 계약의 힘이 작동합니다. 참가자들은 '게임의 3가지 규칙'이 담긴 동의서에 서명하고 입장합니다. 주최 측은 리바이어던이 되어 규칙을 어긴 자를 냉혹하게 처단(탈락)함으로써 게임의 무결성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이 겉보기엔 완벽한 규칙 역시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규칙의 틈새를 악용해 징검다리 유리가 강화유리인지 일반유리인지 불공정하게 판별하는 변수가 발생하자, 시스템 전체의 신뢰성이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제가 현업에서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영문 계약서와 주주간협약서(SHA)를 검토할 때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것도 바로 이 '계약의 불완전성(Incomplete Contract)'입니다. 아무리 천재적인 변호사와 엔지니어들이 모여 촘촘하게 계약서를 작성하더라도, 수년에 걸친 대형 인프라 사업에서 발생하는 모든 미래의 돌발 변수와 규제 변화를 계약서 조항에 다 담아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계약서(리바이어던)라는 딱딱한 규칙만 믿고 안주하는 리더십은, 조항의 맹점을 파고드는 파트너사의 기습적인 리스크 요인에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3. 깐부 정신과 신뢰 자본: 상생 철학이 만드는 리스크 헤징(Hedging)
영화에서 가장 감정적인 울림을 주는 에피소드는 단연 구슬치기 게임입니다. 주인공 성기훈(이정재 분)과 오일남(오영수 분) 노인은 손가락을 걸며 서로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깐부'를 맺습니다. "네 것 내 것이 없이 다 공유하는 동맹"을 뜻하는 깐부 정신은, 서로를 속여야 하는 냉혹한 규칙(부조리) 속에서도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후의 '신뢰와 연대'를 상징합니다.
물론 영화 후반부에 이 신뢰마저 속임수로 오염되는 비극이 발생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깐부라는 개념은 현대 비즈니스 거버넌스에서 가장 강조하는 '소셜 캐피탈(Social Capital, 신뢰 자본)'의 중요성을 관통합니다.
여러 합작 파트너사나 하도급사(Sub-contractor)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예기치 못한 인허가 문제나 설계 변경이 발생하면 계약서 조항을 따지기 전에 파트너 간의 '상생 철학'이 먼저 작동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숨기지 않고 투명하게 데이터를 공유(깐부 정신)하여 함께 우회로를 찾는다"는 상호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조직은, 어떠한 악재를 만나도 소송이나 분쟁으로 번지기 전에 리스크를 신속하게 헤징(Hedging)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리스크 매니지먼트는 촘촘한 감시망이 아니라, 파트너십 전반에 흐르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과 신뢰의 두께에 있습니다.
결론: 규칙을 집행하는 자에서, 신뢰를 설계하는 자로
<오징어 게임>은 우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조직은 단순히 처벌과 규칙(계약서)에 의해서만 겨우 굴러가는 삭막한 시스템입니까, 아니면 위기 순간에 서로의 패를 공유하고 연대할 수 있는 신뢰 거버넌스를 갖추고 있습니까?
대형 에너지·인프라 프로젝트를 이끄는 실무자로서 제가 내린 확신은 명확합니다. 완벽한 계약서나 무결한 시스템 매뉴얼은 환상에 불과하며, 규제와 환경은 언제나 우리 시스템의 맹점을 뒤흔들 것입니다. 하지만 규칙이 답을 주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임계점에서, 파트너사들과 함께 상생의 비전을 공유하고 투명한 '신뢰 자본'을 바탕으로 공동의 의사결정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이야말로, 조직의 파멸을 막고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끄는 최고의 공학적 거버넌스일 것입니다.
[시네마 철학 사전]
- 토마스 홉스: 근대 정치철학의 개척자로, 저서 <리바이어던>을 통해 사회계약설을 확립함.
- 리바이어던: 성경 속 괴물에서 따온 명칭으로, 시민의 평화와 방위를 위해 세워진 강력한 국가 권력을 상징함.
- 사회계약론: 개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국가에 양도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형성한다는 이론.
-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국가나 법이 없을 때 발생하는 극단적인 무정부적 혼란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