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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네마 철학] <헤어질 결심> - 라캉의 욕망 이론과 프로젝트 리스크 검증(Due Diligence): 보이지 않는 의도를 추적하라

by siestaplan 2026. 4. 15.

저는 지난 수년간 에너지 및 대규모 인프라 분야에서 프로젝트 개발과 사업 타당성 검토를 담당하며, 수많은 계약 관계와 리스크 분석을 수행해 왔습니다. 거대한 자본이 움직이는 프로젝트의 초기 기획 단계에서는 수많은 이해관계자(주주사, 금융 주선기관, 규제 기관)가 저마다의 제안서와 데이터 보고서를 들고 협상 테이블에 앉습니다.

하지만 노련한 리스크 매니저라면 상대방이 제시하는 매끄러운 서류와 숫자를 곧이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 화려한 지표 이면에는 각 조직의 숨겨진 이익과 의도, 즉 '히든 아젠다(Hidden Agenda)'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서류상에 노출되지 않은 파트너사의 진짜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검증(Due Diligence)해 내지 못하면, 프로젝트는 착공 이후 심각한 계약 분쟁이나 인허가 초토화라는 치명적인 리스크를 맞이하게 됩니다.

박찬욱 감독의 매혹적인 미스터리 로맨스 <헤어질 결심>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단서' 너머의 '보이지 않는 진실'을 추적하는 팽팽한 심리 수사극입니다. 변사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해준(박해일 분)과 사망자의 아내이자 피의자인 서래(탕웨이 분)가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강렬하게 끌리는 과정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제시한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실존적 사유를 완벽하게 시각화한 서사입니다. 오늘은 이 영화를 통해 서류 너머의 본질적인 리스크 요인을 발굴하는 리더의 정밀한 문해력과 리스크 매니지먼트관에 대해 논해보고자 합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포스터


1. 라캉의 욕망 이론: 파트너사의 화려한 제안서 뒤에 숨은 '히든 아젠다'

자크 라캉은 인간의 자아가 온전히 스스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부모나 사회 같은 외부의 존재, 즉 '대타자(The Big Other)'의 시선과 언어를 수용하면서 만들어진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느끼는 주관적인 욕망 역시 순수한 내면의 요구가 아니라, "사회나 타인이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기계적으로 쫓는 '타자의 욕망(The Desire of the Other)'에 불과하다고 진단했습니다.

영화 속 해준은 품위 있고 정결한 형사라는 대타자의 프레임(욕망)에 자신을 가둔 인물입니다. 그는 인공눈물을 넣어가며 사건의 단서(데이터)를 치밀하게 수집하고 분석합니다. 피의자인 서래 역시 해준의 그러한 '품위 있는 형사로서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가 원하는 완벽한 피의자의 단서들을 제공하며 그의 수사망과 내면을 동시에 흔들어 놓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시선(욕망)을 의식하며 정교한 심리 게임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전은 대형 인프라 사업의 Joint Venture(JV, 합작법인) 주주간협약(SHA) 조율이나 계약 협상 테이블에서도 똑같이 재현됩니다. 파트너사들이 들고 오는 화려한 사업 계획서와 리스크 분담 안(Proposal)은 일종의 '해준이 보고 싶어 하는 품위 있는 단서(시뮬라크르)'와 같습니다.

그들은 우리 조직(대타자)이 원하는 완벽한 지표와 사회적 명분(청정에너지 발전 등)을 강조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 회사의 단기적 금융 이익이나 책임 회피 조항을 교묘하게 숨겨놓곤 합니다. 리더는 상대가 보여주는 매끄러운 제안서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라캉처럼 "저 조직이 우리에게 이 데이터를 보여줌으로써 진짜 얻고자 하는 타자의 욕망(실리)은 무엇인가?"를 입체적으로 역추적(Traceability)해야 합니다.


2. 붕괴와 미제 사건: 가짜 안정감(KPI)을 깨부수고 실재(Reality)를 직시하는 용기

라캉의 이론에서 인간이 완벽하다고 믿는 언어와 시스템의 세계를 '상상계'와 '상징계'라고 부르며, 이 시스템이 결코 담아내지 못하는 가혹하고 날것 그대로의 현실을 '실재(Le Réel)'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시스템 속에서 안정을 느끼지만,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실재의 충격 앞에 서면 시스템 전체가 붕괴하는 경험을 합니다.

영화 후반부, 해준은 서래가 흘린 결정적인 증거(녹음 파일)를 마주하며 자신이 구축해 온 수사의 무결성과 품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붕괴'를 경험합니다. 서래를 향한 마음 때문에 진실을 덮고 사건을 미제로 남기기로 결단한 해준은, 시스템의 규칙을 어긴 대가로 깊은 무력감과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대규모 프로젝트의 거버넌스를 관리할 때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도 바로 서류상의 무결성이 주는 '가짜 안정감의 붕괴'입니다. 보고서상의 공정률 수치나 계약서 조항(상징계)만 믿고 안주하다가, 현장의 심각한 품질 결함이나 인허가 기관의 완강한 거부 반응이라는 가혹한 현실(실재)을 뒤늦게 마주하면 프로젝트는 한순간에 표류(미제 사건)하게 됩니다.

진정한 리더는 숫자가 주는 안락함에 중독되지 않습니다. 붕괴의 징후가 포착된다면 서류를 찢고 직접 현장 실사(Due Diligence)로 내려가 불편한 진실을 똑바로 대면하고, 즉각적인 Plan B를 실행할 수 있는 실전적 용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3. 마침내 바다 속으로: 완벽한 리스크 통제를 향한 엔지니어의 정직한 직관

영화의 압도적인 결말부, 서래는 해준에게 영원히 잊히지 않는 완벽한 '미제 사건'이 되기 위해 만조의 바닷가 갯벌에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파도 속으로 사라집니다. 해준은 물이 차오르는 바다 위를 미친 듯이 헤매며 서래의 발자국을 찾지만, 밀물이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 바다는 끝내 아무런 단서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단서(데이터)가 완벽하게 은폐된 최악의 불확실성 상태입니다.

현업에서 마주하는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나 대외 정치적 규제 변화는 영화 결말부의 거대한 밀물처럼 우리의 예측 모델과 데이터 아카이브를 순식간에 집어삼키곤 합니다. 단서가 사라진 바다 위를 헤매는 해준처럼, PM 역시 정보가 차단된 불확실성의 임계점 앞에서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때 프로젝트를 구원하는 것은 시스템의 자동화된 알고리즘이 아니라, 수년간 현장에서 뼈저리게 축적해 온 '엔지니어의 주체적인 직관과 경험 자산'입니다. 데이터가 침묵할 때, 축적된 경력의 문해력을 바탕으로 리스크의 흐름을 읽어내고, 파트너사 간의 이해관계를 상생의 비전으로 다시 정렬(Alignment)시키는 통합적 조율 능력이야말로, 거대한 불확실성을 뚫고 프로젝트를 지상(성공)으로 안착시키는 최후의 마스터키가 됩니다.


결론: 단서 너머의 진실을 책임지는 리더십

<헤어질 결심>은 우리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파트너사와 시스템이 보여주는 매끄러운 보고서와 합격점 지표라는 '타자의 시선' 속에 갇혀 안주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장막 너머에 숨겨진 현장의 진짜 리스크와 의도를 추적할 날카로운 눈을 쥐고 있습니까?

대규모 에너지·인프라 산업을 다루는 전문가로서 제가 내린 철학적 확신은 명확합니다. 서류와 숫자는 언제나 현장의 미묘한 위험 요인을 은폐하는 매끄러운 껍데기가 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제공하는 단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직접 발로 뛰며 이해관계자의 진짜 니즈를 파악하여 선제적으로 리스크를 헤징(Hedging)하는 리더의 정직한 통찰력과 책임감이야말로, 불확실성의 밀물 속에서도 프로젝트의 가치를 안전하게 지켜내는 최고의 공학적 솔루션일 것입니다.


[시네마 철학 사전]

  • 자크 라캉: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언어학적으로 재해석한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 상징계(Symbolic Order): 언어, 법, 관습 등 사회적 질서와 체계가 지배하는 영역.
  • 상상계(Imaginary Order): 거울을 보듯 자아를 이미지로 통합하고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영역.
  • 실재계(The Real): 상징계와 상상계로 포섭되지 않는, 언어 너머의 날 것 그대로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