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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칼럼] 9회보다 뜨거운 7회의 과학: 레버리지 인덱스(LI)가 바꾼 불펜의 지도

by siestaplan 2025. 11. 25.

[에디터의 한마디]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 불리지만, 현대 야구는 그중에서도 '불펜 놀음'으로 진화했습니다. 과거에는 9회를 책임지는 마무리 투수가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았지만, 데이터 야구의 시대는 묻습니다. "점수 차가 큰 9회보다, 1점 차 만루 위기인 7회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오늘은 경기 상황의 압박감을 수치화한 레버리지 인덱스(Leverage Index, LI)를 통해, 감독들이 어떻게 '가장 강한 투수'를 '가장 위험한 순간'에 배치하는지 그 고도의 전략적 메커니즘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1. Leverage Index(LI): 경기 상황의 '중요도'를 측정하다

레버리지 인덱스(LI)는 말 그대로 경기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지표입니다. 1.00을 평균적인 중요도로 설정했을 때, 이 수치가 높을수록 해당 상황이 경기의 승패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9회말 10점 차로 이기고 있는 상황의 LI는 0에 가깝지만, 7회말 1점 차 1사 만루 상황은 LI가 3.00 혹은 4.00까지 치솟습니다.

이 지표의 등장은 불펜 투수의 가치를 완전히 재정의했습니다. 기존의 '세이브(Save)' 개수만으로는 투수가 얼마나 험난한 상황을 극복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LI를 활용하면 그 투수가 얼마나 '터질 것 같은' 상황에 투입되어 팀을 구했는지 정량적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다. KBO 리그에서도 최근 "누가 가장 구속이 빠른가"보다 "누가 고(高) 리버리지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가"를 기준으로 필승조의 보직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2. 클러치의 심리학: 압박감이라는 중력을 이겨내는 법

흔히 '클러치 능력'을 타고난 배짱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 고도의 심리적 루틴과 기술적 신뢰가 결합한 결과입니다. LI가 높은 상황, 즉 클러치 상황에서 투수는 신체적으로 아드레날린이 과도하게 분출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는 근육을 경직시키고 시야를 좁게 만들며, 평소라면 가볍게 던졌을 스트라이크 존 코너 공략을 어렵게 만듭니다.

위대한 불펜 투수들은 이 '압박감의 중력'을 제어하는 자신만의 루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과에 대한 공포(실점하면 진다)를 과정에 대한 집중(낮은 코스에 던진다)으로 치환합니다. 통계적으로도 클러치 능력이 뛰어난 투수들은 고 리버리지 상황에서 오히려 투구 템포를 조절하거나 볼넷을 억제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단순히 기량이 좋은 투수가 아니라, 심리적 회복력(Resilience)이 높은 선수가 현대 야구에서 '최고의 리버리지 소방수'로 대접받는 이유입니다.

3. '고정 보직'의 종말: 리버리지 중심의 유연한 배치 전략

전통적인 불펜 운용은 7회 셋업맨, 8회 브리지맨, 9회 마무리라는 '계단식'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경기의 가장 결정적인 승부처(최고 LI 상황)가 7회에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한 투수인 마무리를 9회까지 아끼다가 경기를 내주는 '비효율의 역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메이저리그(MLB)를 시작으로 '리버리지 마무리(Leverage Closer)' 개념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가장 구위가 좋고 믿음직한 투수를 반드시 9회에 쓰는 것이 아니라, 그날 경기에서 LI 수치가 가장 높게 튀어 오르는 시점(주로 7~8회 위기 상황)에 조기 투입하는 전략입니다. 9회는 상대적으로 낮은 리버리지 상황에서 다른 투수가 막아도 된다는 계산입니다. KBO 리그에서도 감독들이 "오늘 승부처는 7회라고 판단했다"며 에이스 불펜을 당겨 쓰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는데, 이는 철저히 데이터에 기반한 현대적 운용의 결과입니다.

4. 미래의 불펜 운용: 데이터와 코칭스태프의 실시간 협업

앞으로의 불펜 운용은 더욱 정교해질 것입니다. 단순히 과거 기록을 보는 수준을 넘어, 현재 타석에 들어선 타자와 투수의 상대 전적에 따른 실시간 LI 변화를 태블릿 PC로 확인하며 투수 교체 타이밍을 잡습니다. 또한, 불펜 투수별로 "주자가 있을 때의 리버리지 대응력"과 "주자가 없을 때의 구위"를 따로 분석하여 맞춤형 배치를 진행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선수들에게도 새로운 인식을 요구합니다. "나는 9회에만 던지는 투수"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나는 팀이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등판하는 핵심 자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팬들 역시 이제 전광판의 이닝 숫자보다, 현재 상황이 얼마나 긴박한지를 나타내는 '리버리지'의 무게감을 즐기며 경기를 관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 가장 뜨거운 순간을 지배하는 자가 승리를 가져온다

야구에서 승리는 9회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5회에 나온 결정적인 삼진 하나, 7회에 기록한 병살타 유도가 결국 9회의 환호로 이어집니다. Leverage Index(LI)는 우리가 그동안 간과했던 '보이지 않는 승부처'를 빛의 영역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이제 야구 중계를 보실 때, 9회 마무리 투수의 등판보다 앞서 벌어지는 7~8회의 불펜 교체에 주목해 보세요. 감독이 왜 지금 가장 아끼는 카드를 꺼내 들었는지, 그리고 그 투수가 가파르게 치솟은 LI 수치를 어떻게 다시 0으로 평정하는지 관찰하는 것은 야구 관전의 새로운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결국 불펜 운용의 묘미는 '언제 누구를' 쓰느냐는 타이밍의 예술이며, 그 예술의 완성은 차가운 데이터와 뜨거운 심장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집니다.